
I.
제목에 ‘진부한’이라는 단어나 종교와 거리가 먼 미카도 시에서 ‘성 스테파노’의 이름을 언급하게 된 이유는 전적으로 카자마 소야에게 달려있다. 회고나 기념일의 건배사는 연장자가 정하는 법이지 않던가. 그걸 감안하고 이야기를 하자면- 12월 초. 이번 크리스마스 때 뭘 할 거야? 대원들이 식당에서 벗어난 대련 부스와 훈련장에 모여 맥락 같은 말을 주고받는다. 시끌벅적 삼삼오오 모인 대원들이 조잘거리는 걸 보며 시노다 본부장은 슬슬 그럴 때라고 말하고, 쿄코 본부장 보좌는 해당 날에 당직인 부대는 안된 일이라 답문한다. 한쪽에서 보너스를 주어야 하지 않겠냐 말이 나오지만, 그렇게 된다면 다른 기념일에도 더 돈을 달라 할 사람들이 나타날 것이기에 아직은 감안 중이란 가벼운 토론이 오간다.
겨울은 추위의 계절이고, 북반구의 연말은 서늘한 계절이다. 사계가 비교적 또렷한 기후에 위치한 나라에선 온난한 때의 반바지나 반팔을 집 안에서도 감히 꺼내 입을 수 없을 시기다. 내복, 두터운 털옷이나 담요를 꺼내 몸을 마구잡이로 덮는 사람들이 있는 달. 그런 연말에는 새해 기념도 한 종류의 이야깃거리가 되지만 그 이전에는 크리스마스라는 이벤트가 존재한다. 연인과의 사랑스러운 데이트, 가족과의 오붓한 시간, 옆 가족과의 해피 크리스마스 디너, 등등. 미카도 시는 인구의 유지를 위해 이런 대규모의 단합 가능성을 지닌 이벤트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소상공인들은 규모 있는 프랜차이즈의 규격화된 빨갛고 녹색 콕콕 찍힌 돈의 상술에 휘둘리지 않는다. 반면 일정한 수입이 있어야 점포를 유지할 수 있는 대형 기업의 산하 업체들은 나름대로 살 길 찾겠답시고 브랜드의 이름을 사용해 세일이라던가, 배포라는 간사한 수작을 쓴다. 바닥에 눈이 아닌 전단지가 달라붙어 밟고 넘어지는 사례가 과하게 늘었던 작년, 미카도 시는 전봇대에 포스터 붙이는 일을 한시적으로 금지했다. 이번 연도도 마찬가지였기에 폐지를 줍는 이들의 걸음이 느렸다.
보더는 건물의 형태를 지닌 장소였으며 대원의 건강을 위해 난방 잔치가 잘 가동되고 있었다. 보더 내의 인물들은, 미카도 시의 일원과 다른 감각을 지니고 있다. 트리온체 상태에서의 섭취나 감각 제한에 대한 건이 아니라, 미카도 시에 존재하는 불안에 관한 것이었다. 가게 매출이 오르지 않으면 그만둬야 하고, 그렇게 된다면 새로운 일을 찾아봐야 할 텐데 ‘미카도 시’ 내에서는 더는 할 것이 없다는 것이 가족 단위 상인들의 입장이었다. 기업은 미카도 시에 투자를 해야 하는 것이 옳은지, 아닌지에 대해 고민했다. 망가지지 않은 채로 운영되는 시. 보더라는 방위 단체에 돈을 적당히 집어넣으며 흘러가는 것을 보는 게 전부다. 보더 대원은 아니다. 그들은 네이버라는 것이 더는 침공을 하지 않게 될 때까지 현존할 것이고, 그로 인한 불안정하면서도 확실한 수익이 보장된다. 가끔 학교를 안 가고 당당히 사유서를 제출해 방위 임무에 동원되거나 기타 임무에 투입되기까지 하니, 내내 학교에 앉아있는 것이 지루한 녀석들에겐 최고였다. 그 외에도 대강 이러쿵저러쿵, 그런저런 사유로 경각심이라 할 것이 크게 있지 않겠다. 경제적인 상황의 모자람을 주기적으로 충당할 출구가 있기에 청년들은 이르게 지원받으며 대학을 다녔고, 그 이전의 청소년들은 정말 그걸 직업으로 삼을 거냐는 주변의 닦달에 귀나 막으며 제 계좌로 들어오는 큰 금액에 괜히 히죽거리곤 했다. 밖의 현실감각과 안의 현실감각은 달랐던 것이다.
진은 아라시야마 가족이나 작년과 비슷하게 타마코마 쪽으로 불려가 시간을 보내게 될 거라 일전 말을 꺼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진은. 개인전을 마친 그는, 자판기 앞에서 동전을 집어넣어 이온음료 하나를 뽑아내며 이틀 전의 예언을 반박하는 것이었다. 아, 그런데 그거 말이야. 제대로 될지를 모르겠네. 타치카와는 무력의 합을 맞출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고 안전한 놀이를 통해 실컷 노닥거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깊은 사고를 하지 않았다. 격자무늬 눈은 딸깍, 하고 막 입구가 열린 캔이 아니라 선글라스 아래의 눈에 맞춰졌다. 왜? 질문은 바로 나갔고, 카자마는 그 뒤를 잇는 공백에 눈을 감지 않는다. 적어도,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하기 위해 고개를 들어 둘을 바라보았다. 고참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사실을 짚어보자면, 구 보더 시절부터 존재한 인원이 진 유이치. 구 보더의 인원을 스승으로 두어 영입된 사람이 타치카와 케이. 구보더의 잔재와 연결점이 있는 대상이 카자마 소야. 그 정도이다. 셋은 짧지만 청년이기에 긴 시간만큼 서로를 마주해왔다. 연령도 다르고, 할당된 일이 다름에도 궤변에 가까운 공통점이 관계를 유지했다. 공과 사의 구분이 애매한 보더 내에서 같이 얼굴 맞대며 활동한 기간이 기니, 친밀하지 않은 것이 되려 이상한 일이긴 하겠다만. 하여간 그랬다. 셋을 공통적으로 묶는 단어는 책임이다. 진 유이치는 책임을 진다. 타치카와 케이는 책임을 넘긴다. 카자마 소야는 책임을 논한다. 각자 보더와 연관된 방식으로 의무감을 간직한다고, 카자마는 결론을 내린지 좀 됐다. 모가미 소이치라는 사람이 살아있었더라면 진 또한 타치카와와 비슷할 정도의 멍청한 말을 하고 살았을지 모르는 일이다. 그러면 시끄러웠겠군. 가족의 죽음과 네이버 사이에 깊은 관계를 맺어 판단을 내리지 않는 건 카자마 본인에게도, 진에게도 해당되는 문장이었다.
ES가 언제부터 있었냐는 질문에 ‘난 원래도 미래를 볼 수 있었는 걸요.’ 정도의 답을 한 청년. 청소년. 소년. 부모의 부재. 진이 특정한 위치에 올라간 뒤로는 관심이 줄어들었으나, 전엔 그의 암시를 여러 방면에서 써먹으려고 한 이들이 가득했다. 보더 내에서 ES의 정보를 통제한 이유가 진의 사례로 인한 것이란 말은 과언이 아니리라. 그리고 타치카와를 본다. 원래도 남의 말에 바로 반박하거나 사족을 붙여 마구잡이로 떠드는 인간은 아니었다. 상황이 마땅치 않을 때에 자기 의견을 소리내는 면이 여전해 그를 철부지로 보는 시선도 있었으나 그건 4년 전, 보더가 구축될 당시의 인물들의 한정된 평가다. 타치카와는 투쟁하거나 반란을 도모하는 인간이 아니었지만 본래 지닌 열기가 많았다. 분출 통로를 보더에서 찾았다. 학교에서 성적도 낮고 어쩐지 기시감이 있지만, 그래도 미카도 시 구하기는 그럭저럭 하는 놈이 됐다. 호전적이란 단어는 붙일 수 없다. 칼을 부딪히고 상대와 발을 부딪히는 것으로 격자무늬 세상에 좌표가 찍힌다. 카자마 소야는 진 유이치와 타치카와 케이가 네이버가 없는 시대나 공간으로 갈 수 없게 된 인간들이라 본다. 보더 대원 치고 그의 감수성은 비교적 밖에 기점을 두고 있기에, 난방비와 동사 사이에서 갈등하는 돈 없는 프리타의 심정을 헤아리면서 두 청년의 돌아오지 않을 과거에 대해 곱씹는다. 나아갔음에도 여전히 정체된 부분이 도드라지는 지금의 상황에서 더더욱. 진이 자판기 건드린다고 준 쌀과자 봉지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어, 한 조각을 끄집어낸다. 입에 물어, 아작. 하고 한 입을 부숴 먹는다.
진은 이온음료의 입구 가까이에 입을 붙여 음료를 마신다. 목구멍 너머로 무언가 넘어가는 순간, 타치카와가 곤란하다 여겨질 법한 말을 잠깐은 침묵해줄 거란 사실을 봤다. 볼 필요 없을 정도로 알고 있다. 그 판단이 정확하게, 타치카와는 잠깐 말을 아꼈다. 그는 사회성이 모자란 인간은 커녕 배려라는 것의 한자를 쓸 줄 모르는 모질이의 신분에 머무른 적이 없었다. 그렇다 해서 이런 인간관계의 구축이나 타인과의 대화에 있어 경험이 다양하거나 특출난 신경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타치카와는 눈을 깜빡이거나 우회적인 단어를 고르는 선택지 대신 입술을 닫은 채로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길 택한다. 마무리되지 않은 대화의 연장선상이다. 모가미 소이치가 죽은 이후로 진은 날카로워졌다. 어딘가 세상과 유리되고 말았다는 말이 옳다. 자기 세상에서 가장 잘 싸워주는 친구는 진이었는데, 덜컥 그 물건 하나가 사람을 가져가버린 것이다. 공백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던가. 회상하지 않는다. 그건 머리가 아픈 일이다! 마주치지 않았던 시절 느낀 공허가 생각보다 크다는 걸 진이 랭크전에서 복귀하게 될 거란 말에서 알아차렸다. 절로 나온 기쁨이 간만의 감정이었던지라, 집에 가서도 기대가 되어 한참 설레며 잠에 쉽사리 빠지지 않았었다. 타치카와는 그 짧은 기간 후로 집요해졌다. 본인이 이를 알아차릴 정도로. 진 유이치라는 사람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이해하려고 했다. 부모에게서 얻지 못한 것을 어떻게 갚아주겠다고, 받은 적 없는 것을 어떤 식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본인도 웃겼으나 노력은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렇게 한다. 참을성 있게 기다리다가, 진의 입술이 드디어. 드디어! 알루미늄 캔과 거리를 둘 즈음 입을 연다. 바삭, 바삭. 카자마는 쌀과자 하나를 다 해치우고, 입가에 묻은 걸 손등으로 닦는다.
불이 끝난 자리에는 타다 남은 나뭇가지가 밟히고, 홍수가 휩쓸고 간 자리엔 젖은 나뭇잎이 뭉쳐져 있단 고등학교 시절의 시 구절을 복기한다. 기간이 오래됐기에 제대로 된 문장이었던지, 아니면 각색인지 진은 구분하지 않았다. 기억은 변절된다. 그는 모가미상이 자신의 귀를 막아주며 하던 말이 어떤 음색이었는 지 구분하지 못하게 됐다. 카자마 또한 카자마 신의 문장을 기억하지 않고 있으리라 싶었다. 알루미늄 캔 끝에 입술이 베인다. 성급히 입을 열려고 한 탓이다. 타치카와가 그 공백을 뭐라도 봤어? 라고 소리내며 박차고 들어오면, ‘타치카와 씨는 여전하네.’ 그런 생각을 한다. 그러다가, 자신은 여전하지 않은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만다. 지나가던 대원들이 진에게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한다. 원정으로 인해 자주 출현하지 않는 타치카와는 소수의 인맥을 주로 삼고 있으며, 카자마는 애초에 활발한 교류를 보더 내에서 하지 않았다. 진은 이 상황이 어색했다. 불, 물, 다음에는 뭐였지. 음양오행설에 따르면 뭐 나무 따위나 토양, 아니면 공기? 그러면 태풍이나 -진은 바람이란 단어에서 연상되는 물체를 잊기에 바빴다.- 지진일까. 일본이란 나라는 불의 고리에 걸쳐져있기에 지진이나 쓰나미가 쉽게 밀어닥친다. 산이 뒤를 막고 있고, 바다와 거리가 먼 것이 그나마 다행인 일이다. 네이버의 침공 도중 일어날 자연재해를 감안했다간- 봐버렸다간 머리 퓨즈가 나가버렸을 것이다! 하하. 진은 마르게 웃었다. 돌아가는 와중에도 쿨러 앞에 놓인 컴퓨터 본체가 된 기분이다.
카자마는 진의 입가 위로 핏방울이 맺혀 떨어지는 것에 남방 안쪽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셋 중에 입을 연 사람은 셋이나 됐으나 소리는 타치카와의 입에서만 나오고 있었다. 단촐한 문장이 끝나기 전 카자마는 진의 눈매가 올라간 것을, 타치카와의 시선이 곱게 구겨지는 알루미늄 캔의 모서리에 닿았음을 확인한다. 다른 대원들 지나가기 쉬우라고 옆으로 비켜나며 한숨을 쉰다. 진의 웃음소리에 대한 반응이었다. 타치카와는 이 사이에서 자신이 가장 눈치없는 놈이 됐단 생각이 들었으나, 기분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럴 수 있지. 그런데, 왜 진이 크리스마스때 못 논다는 걸까? 그것 뿐이었다. 무게감이 없는 문장이 진의 입에서 나오게 될 거라 예상하며, 모가미와 다른 방식의 접근법을 택한다. 그런 동작은 진에게 있어서 긍정적이라곤 볼 수 없는 ‘작태’에 가까웠으나, 방심한다. 타치카와는 되묻는다. 물음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선 의문이고, 의도적인 측면에선 제안에 가까운 말이다.
“그러면 진, 크리스마스때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술 마시러 갈래?”
“애석하게도 타치카와 씨, 내 사이드 이펙트가 말하는 거지만, 나는 그때 하루 내내 바쁠 예정이거든.”
“네 예지를 존중해주고 싶지만, 이번에도 뒤틀어버리고 싶은 걸.”
“하하, 그 말조차 이미 과거에서 보고 왔다고 한다면?”
“하지만 진, 너는 문장을 미리 볼 뿐이지 의지를 읽을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카자마는 타치카와에게 굳이, 진이 그날 아라시아먀나 타마코마에 있지 못할 거라는 말이 ‘그 누구와도 마주할 시간이 없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설명하지 않는다. 둘에겐 무른 자신을 본다. 카자마는 손수건에 쌀과자 가루가 안 묻었다는 걸 확인한 후, 진에게 건넨다. 진은 먼저 손을 내민 채로 기다리고 있었기에, 바로 받아 입가에 붙인다. 다른 손으로 구겨진 캔을 휙, 던져 쓰레기통에 집어넣는다. 동그란 구멍으로 쏙, 하고 들어간 것이 바닥에서 다른 것과 부딪혀 신경 거슬리는 소리를 낸다. 타치카와와 진이 좀 더 투닥거리다가, 카자마는 진의 뒷주머니에 들어간 핸드폰의 화면에 깜빡, 빛이 들어온 걸 본다. 0.5초 정도 뒤에 전화벨 소리가 난다. 타치카와는 마지막 징검다리 앞에서 접근제한 팻말을 발견한 꼴이 됐다. 진이 전화를 받으며, 네, 초특급 엘리트 진입니다~ 정도의 실없는 소리를 하다 알겠다는 말과 함께 둘에게 양해를 구하며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타치카와는 남겨졌다. 카자마는 이번에도, 라는 수식어를 붙였고 타치카와는 왜? 라는 새로운 물음을 던졌다. 소리는 나오지 않았지만 뱉어졌다. 카자마는 한 장 남은 쌀과자를 타치카와의 입에 물린 후, 비닐봉지를 깔끔히 접어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종이, 알루미늄 캔, 비닐과 플라스틱. 알맞은 곳에 분리수거를 한 후 타치카와랑 보더의 성인들끼리 모여 한 번 거하게 마실지도 모르겠단 소식을 전한다. 니노미야의 술에 취한 모습이나, 카코의 뻗은 모습을 볼 수 있게 될 지도 모른다며 -카자마는 문득 이것도 경쟁의 일종인가? 생각한다. - 흥미를 보인다. 둘의 대화는 금방 그쪽으로 빠져나간다. 걸음 또한 대련 부스에서 멀어진다.
II.
카자마 부대에서 크리스마스 파티에 대한 말이 나온 건 며칠 뒤의 일이었다. 우타가와와 키쿠치하라, 미카미가 합심해서 제안을 했다. 그 날 일정 있으신가요? 아니, 바로 본론부터 꺼내자니까. 카자마 씨, 저희가 할 말이 있어요. 분주한 문장들 사이에서 카자마는 턱 끝을 들어 눈을 맞춘 후 뭔가, 하고 가볍게 묻는다. 안된다고 그어두는 것 보다 선행되어야 하는 문장이 있다는 점을 읽고, 그들의 말을 기다린다. 카자마 부대의 청소년들은 자기 멋대로 조잘거리기 시작한다. 셋 다 말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님에도 카자마는 지금 이 풍경이 부대실 밖에서 열심히 크리스마스 파티 계획을 짜고 즐거워하는 타 대원-아이들과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라 여기게 된다. 키쿠치하라는 타인과 소통이 잦지 않다. 토키에다가 요전에 일러준 미쿠모를 향한 조언은 그 치고는 상당히 유별난 모습이었으리라. 우타가와는 자신의 일 보다도 카자마 부대를 향한 말에 민감하다. 쌓인 것은 없겠지만 가끔은 어떤 반응을 보이면 좋을지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미카미는 배려에 특화된 인물이다. 그 점이 카자마가 키쿠치하라의 공격성과 우타가와의 강직성을 직접적으로 인지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어리다. 그의 배려를 돌려주는 것이 본인의 일이다. 많은 형제들 사이에서 자라왔으니, 적절한 인정이 필요하다, 싶다. 숫자로 따지면 두 자리를 넘어가지도 않는 나이 차이지만 성인과 아닌 것에는 다름이 존재한다. 논외나 예외, 별개도 존재하지만 이곳에선 아니다. 카자마는 슬슬 카자마 부대 전원이 이런 이벤트, 축일, 기념일 같은 때에 같이 모여 시간을 보내도 괜찮지 않나 싶다. 고등학생이고, 늦은 시간이 오기 전에는 돌려보낼 테니까. 무슨 일 생기면 연락이 가능한, 이들의 부모님 연락처 또한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다. 하지만 카자마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키쿠치하라는 카자마의 심장박동이 오히려 늦어졌다는 걸 들은 후, 입을 닫았다가, 심퉁맞은 얼굴로 소리를 낸다.
“저희가 어려서 안 된다고 할 생각인가요, 카자마 씨?”
“카자마 씨, 저희도 나이가 있습니다. 이제 고등학생이라고요.”
“그렇다는데, 카자마 씨. 둘의 의견도 좀 들어줘. 지금까지 하고 싶었던게 많은 아이들이잖아.”
“아이라니, 너는 아닌 것 같아 미카미?”
“제안 시작은 내가 안 했어.”
“말을 꺼낸 건 너였잖아.”
“자, 자. 키쿠치하라 진정해. 미카미도 그렇게 놀리듯이 웃지 말고.”
입을 열지 않았는데도 상황이 시작됐다 끝나는 이 상황이 귀엽기만 하다. 미소지으며 키쿠치하라의 이마를 톡, 건드린 카자마의 말은 늘 그렇듯 깔끔하다. 그런 것 때문이 아냐. 개인적으로 생각할 일이 있어서, 고민을 좀 해봐야 할 것 같아. 키쿠치하라의 삐죽 나온 입술은 우타가와가 눌러도 들어가지 않고 있다. 이번 년도는 너희와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다 생각했어. 상황이 여의치 않아 제대로 말을 한 적이 없었던 것 같군. 키쿠치하라의 입술이 들어간다. 우타가와는 바쁜 해였다고 덧붙이며 동조하고, 미카미 또한 고개 끄덕거리며 이번 년도에 있었던 보더 내부의 유별난 일들에 대해 언급한다. 원정. 전쟁. 랭크의 변동, 기나긴 시험. 원정에 뽑힌 사람들에 대한 가벼운 수다가 이어지는 건 뒤의 일이다. 삭막하지 않은 풍경 속에서 카자마는 조용히 핸드폰을 들어올린다. 이미 정해진 키자키, 스와, 레이조와의 약속 방에 ‘그래서 몇시’ 정도의 답을 보낸다. 아래로 스와가 바로 답을 보낸다. ‘시간 되냐?’ 답하지 않더라도 레이조가 줄줄 말을 단다. 쟤는 이 시간에 일 안 하고 핸드폰만 보나. ‘작년에는 일이 있다고 했어’, ‘재작년에는 가족과 시간 보낸다고 했고’, ‘그래서 이번 년도엔 뭐라 하려고’. 보다 못한 키자키가 보더 내의 일은 원래 바쁘다고 원조하자, 그걸 모르는 놈이 여기 있진 않다고 스와가 가벼운 메시지를 서너개 보낸다. 화면을 끈다. 이야기는 어느새 크리스마스날 먹었을 때 맛있었던 음식에서, 자신이 만들 수 있는 간편식에 대한 것으로 전환된다.
타치카와의 사정은 다르다. 원정대는 대부분 가족과 보낼 시간이 소거되곤 하기에 이런 특별한 때가 오면 무조건적으로 다른 사람들 곁으로 간다, 고 해석했다. 함께라고 해봐야, 신년 다음 날 보더에서 받은 떡을 따뜻하게 뎁혀 나눠먹으며 시답잖은 기억을 공유하는 것이 전부다. 이즈미쪽으로 슬금슬금 걸어가 무슨 대화를 하고 있냐 말 던지면, 이즈미는 타치카와 씨, 이름을 부르며 반응한다. 옆에 있던 요네야와 미도리카와가 인사를 하는 것에 그래, 하고 손 한 번 가볍게 흔들었다가 만다.
“그러고보니 타치카와 씨는 이번 크리스마스에 어디 가려구요?”
“음? 나야~ 아마 아즈마 씨가 사람들 모아둔다면 슬쩍 끼어들어서, 술이나 얻어마시지 않을까 싶은데.”
“아하. 크리스마스 날 뭐 하고 놀 건지 말 하고 있었거든요. 왜, 요네야가 먼저 우사미랑 그 날 못 놀게 되어서 슬프다고 투정부리길래.”
“투정 안 부렸거든.”
“투정 부렸잖아.”
“안 부렸거든?”
“분명히 부렸어.”
만담 사이에서 미도리카와가 손을 번쩍! 들며 튀어나온다. 타치카와는 이걸 받아야 하는 건지 고민했으나, 알아서 바닥에 착지하는 걸 보고 팔을 들지 않는다. 진 씨는 이번 크리스마스때 어떤 일정을 가지게 될 거라고 하던가요! 이즈미는 타치카와보다 진이 더 대하기 쉬운 겉임에도 불구하고, 당사가자 아닌 당사자의 친구에게 바로 질문하는 미도리카와가 대단하다 생각했다. 다행인 일이지. 고개를 돌려 타치카와를 보면, 타치카와는 흥미로운 걸 본 눈을 하고 있다. 저런 측면에서는. 일축한 이즈미와 별개로, 타치카와는 바로 답할 수가 없는 상황에 다다른다. 잘 몰라, 혹은 직접 물어보는게 어때? 아니면 바로 아니, 아라시야마 쪽으로 가거나, 우사미 처럼 타마코마 본부에 남아있을 거라 했던 것 같은데. 아까 보니, 영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정공법을 택할 수 있었으나 선택을 할 수가 없다. 없었다. 타치카와가 자신의 턱에 난 수염 부근을 엄지로 문지르며 고민하는 태도를 취하자, 미도리카와는 불퉁해졌지만 그래도 밝게 기다린다. 결국 들린 불확정한 답에는 실망하는 태도가 역력했지만, 투정이나 투덜거림으로 끝맺어버린다.
“타치카와 씨, 그거 정말 진 씨가 말한게 맞아요?”
“그럼. 내가 굳이 거짓말이라도 해야 해?”
“아니, 애초에 우리 타치카와 씨 그럴 지능 없다니깐, 슌.”
“어라, 나 그렇게 얕보이고 있어?”
“지능적인 측면에서는요.”
이즈미는 앞서 타치카와가 말을 꺼낸, ‘진은 크리스마스 같은 날에 누군가를 만나고 싶지 않다는데.’의 문장을 곱씹기 시작했다. 찰나였고, 틈이었다. 요네야가 웃으면서 미도리카와의 머리카락을 복슬거리게 만지고, 또 별 의미도 없는 말을 주고받으며 시시덕거린다. 향수에 잠긴 타치카와는. -향수라는 단어를 스스로에게 적용하게 된 타치카와는, 따라하듯 이즈미의 머리를 두어번 토닥. 토닥하고 대화에서 비킨다. 네가 부탁하면 진이 들어줄 지도 모르지. 미도리카와가 그 말에 곧바로 땀을 삐질거린다. 동경과는 거리가 먼 감정을 지닌 채로 진을 봐온 자신이기에, 그런 미도리카와를 이해하기란 참 어려웠다. 하지만 안다. 대강, 시노다 씨랑 놀고 싶었던 시절의 나라고 보면 되는 거잖아. 카자마의 생각 그대로, 타치카와는 모질이로 남기엔 조금, 삐끗했다. 대학교에서의 행실이 바르지 못하다 해서 그가 성인이 아니라는 말은 될 수 없기에. 엄지가 이즈미의 눈가에 닿으면, 이즈미는 깜빡. 하고 눈을 감았다 뜬다. 윙크가 가능하네. 그렇게 관찰을 하고 받아들인 뒤, 타치카와는 불편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상황을 복합적이게 보고 고차원적이게 생각하는 건 제 일이 아니다. 이즈미가 서포트를 하고, 쿠니치카가 지시를 내리고, 그렇다면 다른 관계에서는?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단 문장이 떠오른다. 이즈미는 타치카와의 생각의 뼈가 굵어지기 전에 앗, 눈 찌를 뻔했잖아요! 정도의 성을 내며 손길을 슬쩍 피한다. 옆구리 툭툭. 그러고보니 타치카와씨, 이번에 아즈마 씨랑 키코, 니노미야 대장이랑 술 한 잔 할 거라면서요? 어른이란 부럽네요~ 요네야는 옆에서 동조하다가 그래도 우리도 곧 있으면 마시게 될 거란 당연한 희망론을 담는다. 미도리카와는 자신은 그 선까지 다다르기에 한참 남았다며, 다시 입술 비죽 내밀어 투정부리기 시작한다. 타치카와는 웃으면서 그곳을 빠져나온다.
익숙하게 트리온체에서 벗어나며, 제 셔츠를 감싼 니트 옷 소매를 다른 손의 엄지로 만지작거린다. 사람의 눈썹과 옷의 감촉은 보드라우나, 온기의 차이가 있다. 핸드폰을 들어 같은 나이대의 대원들에게 들었던 말의 사실 체크-라고 적고, 시답잖은 소리 하기라고 해석 가능하다.-를 하러 간다. 단체 연락방에 들어가 지금까지 올라온 이야기를 훑고, 아니, 얘네는 뭐 대화를 하지 않아. 간단히 아즈마 씨가 부름. 감. 감. 못감. 왜? 일 생김. 파이팅. 혹은, 꺼져. 고차원적인 대화라곤 일절 나오지 않는 단체 메신저의 배경은 단정한 색이다. 화면을 나와 메신저 목록을 보면, 상단에 고정된 것이 있다. 타 메신저 방과 다르게 제목조차 없이 인원의 이름만 투박하게 나열된 이름. 알림이 쌓일 경우 최대 숫자는 어떻게 표기되는지 알려준 방. +300정도의 숫자가 적혀있다. 이번에는 우리 가족 모두가 모일거니? 라던가, 케이에게 연락 해볼까요? 정도의 말들이 공개적으로 오가는 것이 티난다. 긴 글은 읽지 못한다. 들어가서 볼 의향이 없으니 당연히 의도는 알 수 없다. 타치카와는 어떠 감정을 느끼고 말아버리나, 해석의 여지를 찾지 않는다. 그것이 진과 다른 점이다. 그것이, 타치카와를 어린 사람으로 만들고, 그를 건강한 사람으로 구성한다.
이맘때면 늘 시끌벅적 거리는 메신저 방은 서넛 있었으나, 타치카와 케이 본인이 응답하는 곳은 단 한 곳 뿐이다. 확인하지도 않는 곳은 단 한 곳 뿐이다. 누군가가 이를 봤다면, 가령 카자마가 타치카와의 핸드폰 화면 위에 놓인 걸 모조리 알 수 있었더라면 침묵했을 것이다. 가족과 연락을 해. 니노미야와 카코와는 늘 그런 식으로 대화하는 건가. 시노다 씨와 자주 연락하지 않게 됐군. 세 가지의 선택지. 그걸 놓고 아무렇지도 않게 4안을 골랐을 것이다. 타치카와는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마자, 화면을 끈다. 느긋한 걸음으로 부대실로 향한다. 신발코에 근심걱정이 걷어차이지 않는다. 걸음은 묵직해서 소리가 드무나, 마음엔 짐이 없으니 신체가 묵직하지 않다.
III.
하루에도 수십건의 일이 벌어진다면, 일주일엔 얼만큼의 사건과 사고가 터지며, 그 며칠들이 뭉쳐진 한 달은 얼마나 복잡하겠는가. 하루하루가 흐른다. 눈이 내린 날 몇몇 대원들은 굳이 밖의 방위 임무를 서고 싶다고 했다가 혼나고, 몇몇은 눈두덩이 가득한 곳에 드러누워서 팔과 다리를 바둥거리다가, 스노잉 엔젤은 커녕 되다만 모래시계, 어쩌구 저쩌구를 만들곤 했다. 스즈나리와 타마코마는 근방의 눈을 치우고, 동시에 돌아다니다가 서로를 마주할 적 마다 덕담을 주고 받았다. 상층부에선 크게 그렇다 할 임무가 나오지 않았고, 원정대 또한 기한이 걸리는 일이니 보더 내의 모든 인물들이 전체적으로 늘어진 채였다. 가끔 들어오곤 하는 비정형적인 형태의 네이버와 역 근처의 보더 내 청소년들의 인권에 관한 시위, 그 건너편의 보더의 입대를 환영한다는 아라시야마 부대의 포스터. 가게들은 전기세를 두려워하면서도 이때 아니면 사람을 가득 모을 때가 없으리라 싶어 가게 밖에 달린 간판과 풍등을 치장하고, 꼬마들은 소복히 쌓인 눈 위에 작은 걸음을 종종 찍는다. 새들도 이를 따르듯 선을 톡톡 찍는다. 퇴근 길, 이를 확인한 직장인들은 무심하게 넘어가나, 그 중 몇은 사진 찍어 SNS에 업로드한다. 학교에 간 학생들은 선생님께 추위 조심하라는 말을 들음과 동시에 곧 있으면 올 겨울 방학 때 게이트가 열릴 경우 대피소가 어디인지, 비상 연락망은 누구인지 연계지점을 미리 확인하란 잔소리를 듣는다. 하교 중에 떠든다. 이번 년도 끼지만 다니고 역시, 이사하게 될 것 같지. 그래? 우린 형제가 보더라서, 바로 나가게 될 것 같진 않아. 그 왜, 역 근처의 오코노미야키 집. 거기 이번에 망했다고 하던데. 아, 그래? … 미카도 시에서 사람은 계속 빠져나가는데, 그러면 들어오는 인구는 어떻게 되는 거지? 글쎄. 우리가 그것까지 알기엔, 너무 어리잖아. 그렇긴 해. 경중이라곤 한 치도 없는 평서문이 겨울 눈에 묻힌다.
크리스마스에는 각종 소문이 떠오를 것이고, 당일 밤에는 자연스레 기쁨이 모여들 것이다. 이를 해치지 않기 위해, 보더 상층부는 보더 내에서 순찰 강화 명령을 내렸고, 어찌저찌 일이 흘러가다 보니 딱 크리스마스 날, 당직의 지휘를 하는 A급 대원으로 진 유이치가 뽑혔다. 그의 예언대로 행해진 것이다.
타치카와는 여기서 투정을 부리거나, 혹은 별 꼴값을 떨다가 카자마에게 끌려가는 일을 겪어야만 했으나- 진은 선글라스 너머로 가만히 지켜보는 타치카와와 눈을 마주쳤다. 어떠한 미래가 보이게 된다. 미래시는 본 것의 결과를 내놓는다. 이미 한 번 본 사람이라면 짧고. 길게 봐온 사람이라면 그 영향력은 길다. 여기서 진은 ‘그래도 타치카와 씨가 원하는 대로 될 거야.’ 라는 말을 먼저 꺼내두어야만 하는 건지 싶다. 당연한 것을 뒤틀려고 하는 사람이 있던가. 물론, 역사라는 것에 있어 지금은 당연하지 않은 것들이 보편화되던 시대에는 이에 대한 반발이 있었으나, 미래시는 그와 다르다. 미도리카와가 뭔가 말을 하고 싶어 입을 비죽거리는 듯 했으나, 긴 시선을 주지 않고 금방 웃으면서 농담이나 뱉는다. 본질적인 것을 향한 회피나 목적론적인 이념- 등등, 어려운 말은 치우겠다! 진 유이치는 그런 생각에 오래 빠지기엔, 너무 어려운 위치에 처해있게 됐다. 그저 예정된 것 그대로 아라시야마에게 이번 년도는 함께 하기 어렵겠어, 라고 대면으로 의견을 전하고. 앗. 맛있는 도라야키. 한 두 개 정도 얻어먹었다가 얼떨결에 붙잡혀 차 한 잔도 같이 마시고, 토키에다와 함께 셋이서 잔잔히 이야기를 나누다가 풀려난다. 타마코마 지부 쪽에는 발로 뛰어서가 아니라, 대강 핸드폰을 들어 연락하는 형식으로 이야기를 전한다. 너머에서 코나미가 방방 뛰는 것 같은 소리가 난다. 이런 건 미래시로 볼 수 없느 거라 해도, 훤히 알 수 있다. 다행이고, 즐거운 일이지. 그러다 문득 유마나 미쿠모, 치카와 같이 보내는 타마코마의 첫 크리스마스를 이렇게 휙 넘기게 된 일이란 생각이 든다. 복도를 걷다 마주한 대원에게 습관적으로 인사하고, 장난을 칠 수 있는 상대라면 쳤다가- 그대로 얻어맞으며 혼난다! 그러다보면 발 끝은 밖이 아닌 대련실이 되어 있다. 이 시간때가 되면 타치카와와 함께 대련하던 것이, 몸에 그대로 익어 움직이게 된 것이다. 어쩐지 밖으로 나가는 미래가 안 보이더니. 유마와 미도리카와가 -아니, 진은 요즘 애들은 참 회복력도 빠르고, 활발하구나 싶다.- 대련하는 것이 생중계 되는 걸 보며 왁자지껄 떠드는 청소년들을 본다. 그 자리에서 떠난다. 이번에는 정말, 보더 밖을 향해서.
IV.
별 것 아닌 날들이 흐른다. 이누카이가 니노미야를 붙잡고 아즈마씨랑 함께 술파티를 하는게 사실이냐고 추궁하는 장면. 니노미야는 무정하게 바라보다가 한숨 한 번 쉬고 그렇다 답을 한다. 나스 부대는 이번에 특별히 밖에서 어찌저찌 잘 모여, 모종의 크리스마스 보내기를 24일날 한다. 25일 날엔 각자의 집에서 보내기로 했다. 무모한 18세들. 가령 조에라던가, 카게우라나 이누카이, 코우, 아라후네라던가…. 생일을 거의 다 넘긴 꼴인 인간들끼리 모여 술-은 글렀고, 오코노미야키 집에서 진득하니 시간을 보내기 위해 계획을 짠다. 만난다. 먹는다. 해산한다. 이거 제대로 된 계획 맞아? 왜. 시비냐? 아니, 아니. 그런데 에마는? 걔도 데려올 거야. 우리 사이에서 안 불편하겠어? …. 그럼 다른 테이블! 먹히는 소리겠냐. 아니. 다시, 계획을 무산하고 처음부터 구상하기 시작한다. 단란한 타마코마 내에서는 평소에 보기 힘들던 사람들까지 모여 함께 파티를 계획할 거라고 말이 나오고, 스즈나리 쪽에선 타이치가 연말 계획을 짜기 위해 만들어진 시간, 쿠키를 담은 그릇을 가져오다 발라당 넘어진다. 와하하. 웃음 소리와 타이치… 하고 주먹 꽉 쥐는 동작. 첫 연말이란 개념은 없지만, 달라진 성탄절이라는 점은 분명하기에 모두가 각자의 들뜸을 지닌 채로 시간을 보낸다. 오퍼레이터 측에선 간만에 모여-아니, 처음으로 모여 이런저런 담화를 나누는게 어떻냐는 말이 나왔다. 오퍼레이터는 대부분 여성이 자리잡고 있기에, 타 성별을 대하는 것에 있어 어려움이 있는 몇몇 인원은 비교적 편안하게 감안해보겠다든가, 고려해보겠다든가, 혹은 시간을 확인하겠다고 답변을 내놓았다. 상층부는… 키누타 본부개발실장 자녀와 행복한 시간을 생각했고, 네츠키 미디어 대책실장은 크리스마스를 틈 타 트리온으로 모종의 이벤트를 내놓아 보더를 향한 주가를 올리는게 어떻냐는 제안을 했다. 린도 지부장은 타마코마에서 거대한 크리스마스 트리를 들여놓으면서 방긋거렸고, 카라사와 외무 영업부장은 모 회사의 10대 자문인과 말을 나누다가 럭비에 대한 잡담을 늘어놓았다. 시노다 본부장은 사와무라 본부장 보좌와 함께 율무차를 마시며 대원들이 요즘 보더 내의 카페에서 코코아 위에 동물 모양- 혹은 트리온 모양 마시멜로를 얹어서 마시고 있다는 잡담을 나누었다. 키도 최고 사령관은, 크리스마스가 모두에게 공포스럽지 않고 편안한 날이 되기를 간곡히 빌었다.
청년들은 좀 더 단순하다. 아즈마와 그 외의 성인이 된, 보더 내의 몇몇 고참들이 인원을 늘려 거대한 술파티를 벌이려고 하고 있었다. 미와도 역시 데려오고 싶단 말이지. 아즈마는 사촌을 부르듯이 말했다. 아즈마 씨는 늘 미와랑 사이가 좋네요! 늘 미와에게 째림을 받는 타치카와가 답했다. 카코가 옆에서 네가 너무 둔해서 그래. 핀잔을 주고, 니노미야는 이 시끌벅적한 환경 속에서 조용히 미지근한 물이나 마셨다. 하지만 미와를 데려오면 후타바를 데려오고 싶을 지도 모르고, 그렇게 되면 술은 커녕 얌전히 보리차만 마시게 될 거라는 말을 이리저리 주고받다가- 아즈마가 웃으면서 장소를 보내뒀다고 말 하는 것으로 소란이 일단락됐다. 각자 나름대로의 가정과 나름대로의 환경에서 연말을 보낸다. 크리스마스라는 일 년에 한 번 뿐인 이벤트를 유지하고자 각자가 노력을 하고 있었고…
V.
카자마 소야는 오후 9시 즈음, 그제야 본부 일을 마치고 가게로 향하고 있다는 레이조의 연락에 옷을 챙겨입기 시작했다. 자취하는 곳이 가게에서 가장 가까워, 긴 준비 시간을 들일 필요가 없다. 타치카와야 뭐, 이미 아즈마 씨에게 불려가서 실컷 퍼먹임 당하거나, 마시다가 니노미야와 싸우거나, 카코에게 뭔 소리 듣거나… 미와나 후타바도 함께 끼어들었던가? 그러다 성인 이하의 청소년들을 떠올렸으나, 그쪽은 우선 키쿠치하라가 깊게 연락하지 않고. 우타가와는 늘 무난하고 좋은 인간상으로 보이기에 여러 말을 전해들은 적이 없었다. 미카미는 가족들과? 아니, 셋이서 만난다고 하던가. 핸드폰을 들어 연락을 확인하면, 셋이서 얼추 케이크를 만드는 장면과 빵 칼을 치켜들고-저러면 위험한데-케이크를 조각내는 장면, 굳이 그릇을 네 개 꺼내 세팅하고 자랑하듯 찍은 장면. 세 장. 카자마는 사진을 다운로드한다. 파일을 나눌 필요 없이 저장 버튼을 누른다. 애초에 저장하는 사진이 대부분 그런 것들이라 분류할 필요도 없다. 창문을 닫고. 돌아온 뒤 춥지 않도록 난방을 적당한 온도로만 설정한 뒤 코트를 걸친다. 목도리까지 두른 뒤에 밖으로 나선다.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날 밤이다. 거리에는 전단지 대신 이리저리 찍힌 사람들의 발자국이 나돌아다니고 있다. 크리스마스 아침부터 저녁까지 쭉 눈이 내리고 있어, 오래된 자국은 묻히고 새로운 자국은 더럽지 않다. 소복하게 쌓인 곳 위에 콕콕 찍힌 것. 카자마는 그걸 따라 걷는 것 대신, 괜히 새로운 곳을 누르며 다녔다. 신발 아래에서 뽀드득하고 눈들이 인사해 주는 소리가 마음에 든다. 입김을 뱉으면 길게 연기가 만들어졌다가 흩어진다. 그러고 보니 이제 진이 일을 마치던가. 타치카와는 잘도 퍼마시고 있겠지. 내년에는, 꼭 부대와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하겠어. 그 녀석들이 제대로 크기 전에 한 번 정도 추억을 만들어야 하겠지. 성인이 되니 생각할 거리가 많다. 동시에 참 적어서, 되려 하고픈 것들이 명확해진다. 카자마 신은 그랬을까. 그렇게 카자마 소야는 눈밭 속에서 걸음을 멈춘다. 돌아보면 지금까지 온 길이 보일까. 돌아보면 지금까지 하고 싶었던 것들이 보일까. 고개를 들면 새까만 밤에 새하얀 점들이 찍힌다. 카자마 소야는 문학적인 사람이 아니다. 감상에 젖는 법은 아는 인간이기에, 이 순간이 추위보다 더 어색하단 생각이 들었다. 원정이 잦은 인원은, 필수적으로 타인과의 대화에 있어 어긋남이 생긴다. 생각. 사고방식. 문제 해결에 있어 처리라는 단어를 꺼내는 순간부터 그 틈은 겉잡을 수도 없이 명확해진다. 카자마는 본인이 보더를 적어도 20대 후반이 된 뒤까지는 있게 될 거라고 확신한다. 타치카와나 진은 그보다 더 오래 있지 않을까? 둘은 도대체 어떻게 사회에서 살아가게 될 건지. ES가 들통났다간 큰일 나는 놈 하나. 보더 내의 활동 말고는 생산적인 걸 못할 것 같은 놈 하나. 필연적으로 네이버의 등장이 필요한 셋에게 있어, 저쪽 세계가 참 광활하다는 건 희소식이다. 핸드폰을 꺼내들어 연락을 확인한다. 곧바로 전화를 건다. 어, 레이지. 미안한데 오늘 못 갈 것 같다. 카자마는 연락을 끊자마자 타치카와에게 전화를 걸어 용무만 전했다. 당장 진 데리고 광장의 트리 아래로 와. 어. 어? -뚜 -뚜- 뚜… 카자마는 핸드폰이 몇 번 더 울리는 걸 본다. 스와가 뭐라고 메시지로 하는 것을 보다가, 짧게 웃고 주머니에 핸드폰을 집어넣는다. 손을 모아, 입김을 불어 끝을 녹인다. 연기가 다시 흐트러진다.
타치카와는 연락을 받을 즈음 곤히 벽에 기대있는 니노미야의 사진을 찍으려고 카코와 계획을 짜던 도중이었다. 그러다 니노미야에게 들키고, 뭐하는 거냐? 같은 핀잔을 들으면서 능청스럽게 받아칠 예정이었다. 뚜르르… 카자마 소야. 카코가 냅다 타치카와의 핸드폰 위의 전화 수락 버튼을 눌러 넘긴다. 뭔데? 뭐냐고.
“ 어어, 카자마 씨?”
“ 당장 진을 데리고 광장의 트리 아래로 와.”
“응?”
- 뚜… 뚜… 뚜… -
타치카와는 얼떨결에 끊긴 핸드폰을 향해 어, 그럴게. 같은 엉성한 답을 내놓았다. 아즈마가 눈을 좀 동글게 뜬 채로 바라보고, 주변의 다른 대원들도 의아하다는 듯 타치카와를 바라봤다. 카자마의 또렷한 말이 시끌벅적한 가게 안에서 들릴 리가 없었으나, 그렇다 해서 얼빠진 타치카와의 얼굴을 못 보는 것 까진 아니었다. 누가 뭐라 하기도 전에 타치카와는 한 손을 들어 말을 막으며, 이만 가봐야겠단 소리를 했다. 이젠 황당하단 시선이 그 격자무늬의 눈을 지닌 청년에게 닿는다. 정작 본인도 얼떨떨한 낯으로 코트를 챙겨입고, 춥다고 가져온 두툼한 외투 하나를 더 어깨 위에 덮었다. 아즈마의 목도리를 가져갈 뻔 했다가 알아서 자기 목도리를 찾아 목에 둘렀다. 타치카와의 그릇에는 여전히 먹다 만 불고기 고기가 반절 남아있었고, 좋아하는 향신료 또한 옆에 통을 열어둔 채였다. 니노미야가 한숨을 쉬며 그걸 닫았고 카코는 가는 길에 바보같이 전봇대에 머리나 박지 말라고 비난인지 걱정인지 뭔지 모를 말을 붙였다. 그렇게. 20대 정도의 보더 대원이 모인 파티에서 인원이 한 명 빠진다. 그 이후의 파티는 전화의 상대에 대한 추궁이었고, 다음은 카자마 씨네 파티에 관한 잡담이었고, 그러다 종막에는 그래서 들어봐요 아즈마 씨, 저번에 말이야. 하고 곳곳에서 일어난 치졸한 사건들에 대한 문책-이라 읽고, 좀 더 현실적이게는 고자질이라고 한다-을 이어나간다.
시간은 늦다. 밤이 됐다 못해, 저녁이라고 할 수는 있으나 끼니 의미의 저녁을 섭취하기엔 늦은 때. 진은 그 애매한 시간대를 담당하며 방위를 서고 있었다. 연말에다가 크리스마스니,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과 저녁 시간 만큼은 가지고 싶다는 의견에 따라 진이 그 틈을 채워두겠다 발언했다. 구태여 나서서 그 명을 받아들였다. 예언에서 본 것이냐고 물음이 닿았음에도 진은 사람 좋게 웃으며 답변을 무마했다. 일종의 예언은 맞았다. 미래시로 인한 것이 아니라, 자기예언적인 면모를 지닌 회피였다. 진은 생각할 거리가 너무 많은 인간이었다. 고민할 것도 많았다. 그만큼 자기연민이나 동정,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들을 묵인하고 넘길 방법이 널려있었다. 언제든 잡을 수 있음과 동시에 언제든 놓아버릴 수 있는 것들. 아라시야마네 집에 가서 연말을 보내는 건 오랜 습관 중 하나였다. 그쪽 부모님이 진을 반겼다. 동생들도 자신이 집에 있는 것에 대해 큰 반감이 없었다. 따지자면, ‘사촌이 연말을 틈타서 집에 들렀다’ 정도의 평가에 가까웠다. 아라시야마와 달리 유난스러운 애정행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보너스 포인트이기도 했다. 크리스마스의 산타를 믿는 사람은 없었으나 진은 늘 선물을 준비했다. 낯선 집에 들어가는 이방인이 내놓는 예의상의 물건이란 마음은 진이 말도 안 되는 산타 복장을 입고 호호, 하고 답지 않게 소리 내며 그 집에 들어선 순간 종결됐다. 동생들은 그 목소리와 체격, 아라시야마 곁에 있는 익숙한 태도가 진이라고 말해준다는 걸 알았으나 진에게 달려들었다. 반가움의 정도는 달랐으나 결국 그 주체가 진, 본인임을 알아 그런 것이었다. 그걸 그 자리에서 깨달았다. 그 이후로 진은 아무런 염려 없이 그 집의 문지방을 넘을 수 있게 됐다. 그래서 그럴까? 그는 이번 년도, 자신이 그 집에 닿지 않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그 지점이 바로 진의 자기연민이었다. 지키지 못한 사람. 지킨 사람. 그 사이에서 진은 늘 가치를 두고 계산을 한다. 사람은 늘 최소한의 희생이 일어나는 걸 선호한다. 최악을 고르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모든 상황에서 최선을 고를 수는 없다. 입김이 선로 하나를 비틀어둔다. 아이들만 무모한 선택지를 고르는가? 아니, 어른도 마찬가지다. 그건 나이에 따라 달라지는 찬란함이 아니며, 시대나 성향에 따라 변하는 유치함이 아니다. 모두가 각자의 길을 바란다. 진은 최악에 닿지 않도록 셈을 하고, 최선이라는 말 아래에서 법과 키도의 의도가 엮이도록 명령을 듣는다. 선회하지 않는 선과 언급되지 않는 말들 속에서 진은 제 맡은 바를 수행한다. 이번 연도의 크리스마스 케이크는 참 맛있었을텐데, 그것은 자신에게 배당된 것이 아니다. 아라시야마네 집에는 습관적으로 의지 하나가 더 놓일테지만, 그곳은 지금 즈음 하나의 상징적인 빈자리가 된다. 한 해의 축일은 한 번 뿐이지만, 자신들은 여전히 살아갈 것이다. 애초에, 죽음을 논하기에도 너무 어렸다. 핸드폰이 울린다. 그는 자신의 방위 임무에 대한 알림을 해두지 않고 묵묵히 수행할 예정이었으니, 이런 건 이례적이었다. 미처 보지 못한 미래의 지점속에서 그는 눈을 감고 전화를 받는다. 네에, 타치카와 씨. 무슨 일이야? 그는 되도않는 소리를 할 예정이라면 하하, 웃으면서 대강 둘러댄 후 끊을 예정이었다. 카자마의 이름이 나온 순간 뒤로는 형용하기 어려운 낯으로 빛 박힌 미카도 시를 바라보았다. 진은 곧바로 트리온체를 풀어버린 후, 근처 벤치에 벗어두었던 파카를 챙겨 입는다. 곧바로 크리스마스 트리 아래로 걸어간다. 걸음이 다급하지 않지만, 그렇다 해서 느긋한 것도 아니었다.
VI.
카자마는 서늘한 바람 속에서 눈이 너무 매섭지 않게 내리길 빌고 있었다. 그의 기도는 손을 맞잡아 바람을 불어넣는 식으로 이루어졌고, 그건 다르게 보자면 차가운 손을 녹이는 행위였다. 남이 보기엔 부모 없는 아이가 추위 속에서 떨며 기다리는 것 같아 순회하던 경찰이 말을 걸었으나, 카자마 소야는 아무렇지도 않게 괜찮다고 말을 꺼내는 것 대신 나이부터 언급했다. 21세, 카자마 소야입니다. 동생들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미성에 경찰은 아아, 같은 얼빠진 소리를 내며 인사를 하고 등 돌려 지나쳤다. 그들은 굳이 그의 신분을 대조하지 않았다. 이미 ‘수상하게 어릴 정도로 생긴 성인’의 존재에 대해서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경계선이 그인 구역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곳엔 진과 타치카와가 있을 것이다. 타치카와는 지금 즈음 진을 데리러 가고자 굳이 경계 구역 앞으로 향했을 것이고, 진은 위치를 맞추고자 전화를 하며 걷고 있으리라. 얼굴을 봐야 알 수 있는 미래시는, 다르게 보자면 낯짝을 마주하지 않으면 변화되는 지점을 찾기가 까다롭다. 어떤 미래는 한 순간, 갑자기 찾아온다고 하지만 위급하지 않은 상황에서의 일상적인 예언은… 카자마는 주머니 속에서 약간 식은 녹차 캔을 꺼내는 것 대신, 열이 적당히 달아오른 손을 집어넣어 온도를 유지하게 둔다. 몇 분이 흐른다. 뒤에서는 크리스마스 트리에 걸린 장신구가 반짝거린다. 굳이 트리온체가 아니어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의 존재감을 지닌 2인이 다가온다. 카자마는 그들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그러지 않더라도, 그 둘이 알아서 자신을 호명할 것이다.
예상 그대로 타치카와는 곧바로 카자마 씨- 하고 이름을 외쳤다. 이 미묘한 저녁 시간대에 굳이 광장의 크리스마스 트리에서 사람을 기다리는 건 중앙에 놓인 예쁜 크리스마스 트리를 보고 싶은 아이들과 그의 부모, 혹은 문제는 없나 점검하는 관리인 뿐이다. 아니면 일전 카자마가 만난 경계를 담당하는 경찰이거나. 각자의 책무를 다하는 곳에서 카자마는 그 형식을 받든다. 설명 없이 그들을 이끈다. 진은 좀 더 멍청한 얼굴에서 벗어났고 -보나마자 미래시로 본 것이겠지. 카자마는 속으로만 난색을 표한다.- 타치카와는 여전히 망둥어스러운 행태였다. 그러나 그 두 청년은 성실히, 가장 작은 연장자를 따른다. 추위 속에서 말을 아끼려고 한 그는 문득 걸음을 멈춘다. 고개를 돌려 주머니에 있던, 이제 약간 따뜻해진 틴 캔에 담긴 녹차를 진에게 건넨다. 수고했다. 그 형식적인 말이 닿기도 전에 진은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오묘한 표정을 보니 약간 우습고. 또 신기해서 한참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타치카와는 옆에서 왜 자신에겐 안 주냐고 투정부렸다. 카자마는 타치카와의 입가에 묻은 불고기 소스를 보고 입가는 좀 닦아. 라는 잔소리로 말을 끊어버렸다. 타치카와는 아무런 일도 안 했다는 것 마냥 입가를 옷 소매로 슬쩍, 닦고 털었다. 눈이 가득해서 그의 은밀한 행위는 티가 나지도 않았다. 비교적 1인 가구가 자주 사는 주택가에 들어선다. 몇몇 문 닫은 가게 안쪽으로 가게의 주인과 가족들이 모여 단란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눈에 닿는다. 불이 좀 켜져있는 듯한 가게 앞에 서서 카자마는 문을 열었고, 그러다 주인의 아이구 어쩐담. 사람이 다 차서… 라는 말에 실례했습니다. 의례적이게 답하며 찬 바람을 막았다. 진은 이 장소에서 문득 집으로 가는게 더 빠르단 말을 해야 하는 건지 고민한다. 그 이전에 카자마가 왜 이런 짓을 하는지 물어보는게 더 좋을까? 하지만 앞에 놓인 미래는 참 달콤한 것이었기에, 굳이 입 열지 않고 뒤에서 타치카와랑 같이 시답잖은 말 하는 라디오, 내지 병풍 노릇을 착실히 이행했다. 연말의 가게는 돈을 벌기 위해 열려있어야 마땅하나, 들어오는 사람이 적고 나가는 사람이 그보다 많은 지역에서의 소규모 식당은 오지도 않을 손님을 위해 문을 열어두는 것 대신 주변 사람들을 모아 안에서 한 탕을 땡기기에 바빴다. 이름이 좀 난 곳들은 벌써 사람들로 꽉 차있었기에 발 디딜 틈도 없었다. 문을 확 열면 풍기는 따뜻한 향과 술내음. 카자마는 그걸 직격으로 맞을 때마다 여전히 울려대는 핸드폰 진동의 범인들과 시간을 보내는게 더 맞았을 지도 모르겠다 싶다. 하지만 때는 지났고 지금은 저 멍청한 두 청년과 시간을 보내는게 더 유익하다. 진이 먼저 한 발 빼서 좀 더 깊은 곳의 주택가를 향해 자세 잡은 걸 보고 숨을 뱉는다. 그렇게 셋은 카자마의 집으로 향한다.
“여긴 어디로 가는 길인데?”
“여기 카자마 씨네 집 근처잖아.”
“어쩐지 자기 동네 보듯 잘 돌아다니더라.”
“그게 아니라 해도 원래 여긴 우리 동네거든, 타치카와 씨?”
“아하.”
“무슨 대단한 사실을 알았다는 것 마냥 감탄사 뱉지 말고, 얼른 올라가라. 춥다.”
진과 타치카와의 만담을 끊은 카자마의 음성. 어린 청년들은 네에, 같은 소리를 내며 계단을 밟아 올라간다. 카자마는 반 박자 늦게 올라간다. 사람들이 잘 돌아다니지 않는 거리를 뒤로 한 채로, 자신이 난방을 키고 나왔던가. 그걸 떠올리게 된다. 그래. 적당한 온도로 켜두고 나갔던 것 같다. 만취 상태의 자신이 이곳에 들어와 그대로 동사하게 되는 엔딩은 신문 한줄에도 안 나올 법한 사인이었기에 질색이었다.
VII.
차라리 술에 쩔은 채로 들어와 추위에 잊어버리는 목숨이 더 무거운지, 이름 모를 곳으로 넘어가 차마 부모에게도 알릴 수 없는 곳에서 생을 다하고 마는 것이 더 무거운지. 카자마 소야는 구분하지 않는다. 자신의 눈 앞에는. 이 집에 모인 셋은 죄다 네이버들의 세계에 발을 뻗어본 적이 있던 사람들이었던 탓이다. 카자마가 온도를 두 칸 더 올린 후, 코타츠나 꺼내라고 시킨다. 멀대같이 쭉 큰 청년들은 어버버거리면서 위치를 물으려다가, 진의 예측을 통해 얌전히 장롱을 열게 된다. 이불도 꺼내고. 좀 더 두툼한 걸 가져와서 몸 위에 덮어둬. 구석은 추우니까 그곳엔 짐만 두고. 창문은 제대로 닫겨있는지 확인도 좀 해봐. 카자마의 잔소리에 문득 손님이 자신들인건지, 주인이 자신인건지 헷갈리게 된 타치카와는 말을 착실히 따랐다. 창문 제대로 닫겨있어 카자마 씨. 우와, 이 구석 정말 차갑다! 뭐야, 이 이불 완전 도톰해. 라는 식으로 의사표현을 했다. 그때마다 진은 탁구 치듯 난방을 키고 나갔구나? 카자마 씨, 구석에서 자면 입 돌아가겠네. 아, 이런 이불이 있다면 추위 즈음은 다 무시할 수 있겠어. 소음을 채운다. 카자마는 조용히 부엌의 불을 키고, 저 녀석들 먹을 만한 것이 뭐가 있는지 훑기 시작한다. 케이크 상자 옆을 지나쳐 야채를 꺼내고, 채를 꺼내 물을 받아 씻는다. 벌써 할 일을 다 한 청년들이 기웃거리면, 배추나 깻잎, 그런 걸 씻고 있으라 시킨다. 말은 느적거려도 할 일은 한다. 외투를 가져가 걸어두고 창문틈을 한 번 더 확인한다. 구석을 괜히 발로 누르며 온도를 확인한 후, 코타츠의 온도를 높여둔다. 열이 나오는 곳으로 인해 화상 입으면 곤란하니 밑판이 제 기능을 하는지 손으로 더듬는다. 타치카와가 배추 잎을 열 여섯장 넘게 뜯어낼 즈음 그만두라 한 후, 다시 저 위에 있는 장롱 열어 검은 나베용 냄비를 하나 꺼내라 시킨다. 키가 큰 사람을 초대하면 유익한 점. 굳이 부엌의 대리석 위로 올라가 장롱 여는 짓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 옆의 이런저런 도구도 다 꺼내는 것에 있어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된 그는 흡족한 채로 다시마 서너장과 계란 양념장 같은 걸 꺼낸다. 마트 세일로 사둔 고기도 몇 팩 둔다.
“얼마나 먹고 왔지?”
“어, 아즈마 씨가 술을 두 번째로 딸 때 즈음에.”
“생각보다 많이 먹진 않았네. 진. 너는. 뭐라도 먹었나?”
“음, 아니? 끝나고 타마코마 지부 쪽으로 가서 남은 거나 먹으려고 했지.”
“그런 부실한 식사를 크리스마스 밤에 한다니, 키도 씨도 참 너무하다니까~”
“그렇군. 그렇다면 식사를 준비하겠어. 타치카와, 표고버섯도 제대로 씻어둬.”
“네에.”
“진, 너는 그 숙주나 떨구지 말고. 채는 아래에 하나 더 있다.”
“넵.”
카자마의 명령을 진이 받아 타치카와에게 전한다. 따지자면 보더 내에서 직급이 가장 높은 건- 아니, 헤아리지 말자. 그건 부대의 등급이지 직급이라 볼 수 없다. 어차피 죄다 같은 A급이고, 셋 다 보더 내의 여러가지 정보들에 대해 알고 있지 않던가. 금방 코타츠 위로 냄비가 얹어지고, 끓지 않은 물에 다시마나 국간장 두 스푼, 여러 큼지막한 야채를 넣는 것으로 식사 준비가 끝난다. 3인분 만큼의 수저가 있나 없나 고민하던 카자마는 결국 타치카와를 시켜 인근 편의점에 가 젓가락이나 숟가락을 사오라 시킨다. 타치카와는 나가기 전 이 집의 주소를 다시 읊으며, 케이크는 안 사와도 되겠냐 외친다. 이렇게 보더라도, 저렇게 보더라도 지금의 분위기는 연말 회식이었다. 됐어. 그건 집에 있다. 타치카와는 군말 없이 나갔다. 그 말에 의문이 든 건 되려 진이었다. 손은 착실히 다른 가지각색의 버섯에 묻은 흙을 마저 손으로 털어내고, 미묘하게 난 밑단을 자른 후 한 변 가볍게 씻고. 그 뒤에 물 안에 퐁, 퐁. 넣고 있다. 떡은 모습을 확인하다 굵은 것부터 우르르 집어넣는다. 카자마는 요리하는 사람이 둘이나 있으니 이렇게나 준비하는 일이 쉬워진다는 생각을 잠깐 한다. 진은 집에 미묘한 침묵이 감돈 뒤에야 묻는다. 카자마 씨, 케이크가 집에 있어? 진은 카자마의 얼굴을 보면서 미래를 보았다. 보게 된다. 그의 연말은 포근하고 따뜻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게 됐다. 될 것이다. 마무리도 맞이한다. 그러나 미래를 볼 수 있다 해서 과거를 읽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진의 어조에 당돌함 대신 의문이 묻어났음을 확인한 카자마는 타치카와처럼 미래를 뒤틀어버리고 싶단 말을 입에 담지 않는다. 종결난 사건을 미래에 두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진은 알지도 모르는 사람에 대해 그는 언급한다. 카자마 신의 존재를 읊고, 이해를 위해 그와 늘 맞이하던 크리스마스에 대해 이야기 한다.
“크리스마스가 오면 한 사흘 전부터 집 식탁에 올릴 케이크를 정한다. 버릇이지.”
“입맛이 바뀔 때가 있어 여러 개를 사두고 뭐가 맞는지 심각하고 어처구니 없는 고민을 해.”
“올해는 그게 망고 케이크였다가, 생크림 케이크였고, 결국 도착한 것이 녹차 케이크. 아니지. 오늘 아침에 새로 샀으니, 떡 같은게 콕콕 박힌 신상 케이크가 됐을 뿐이다.”
“원래 집에선 결론적으로 순정. 생크림 케이크 정도로 귀결되곤 했는데,”
띠리릭. 도어락이 소리를 내며 열린다. 타치카와가 으으, 밖이 너무 추워! 같은 당연한 소리를 하며 들어선다. 손에 쥐어진 앙증맞은 수저도구 세트와 또 다른 봉지 안에서 바스락거리는, 존재감 드러낸 맥주가 선명하다. 카자마는 눈빛으로 ‘그게 뭐냐’하고 설명을 요구한다. 타치카와는 “보통 이럴 때엔 술을 마시는 거라구.” 해명한다. 진의 눈은 여전히 카자마에게 고정된 채였다. 진은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난감하다. 카자마 소야는 제 기억으로, 카자마 신의 죽음을 들은 후 울거나 당황해하지 않았다. 침잠한 눈빛을 보인 게 일순, 그는 알겠다는 말을 끝으로 모든 감정과 문맥에 마침표를 눌렀다. 진은 그게 늘 의아했다. 카자마는 이 어린 청년 두 명을 어떻게 동시에 묶어둘지에 대해 고민했다. 진행하던 말부터 끝내기로 한다.
“타치카와, 저 녀석이 떡을 좋아하니까 괜히 사봤지. 맛 없으면 어쩔 수 없는 걸로 쳐. 유명 베이커리에서 찍어낸 신상이니 어색한 건 아닐테지만 말이다.”
“엥. 떡 케이크가 있어?”
“떡이 들어간 케이크래, 타치카와 씨. 아마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거야.”
“오오, 카자마 씨 날 위해 사준 거야? 이거 감동-“
“헛소리 하지 말고 문 닫고 들어와라. 찬 바람이 다 들어오잖아.”
“네엡.”
진의 시선은 허공에서 길게 방랑하지도, 부유하지도 않는다. 애초에 보더 내에서 미래시를 지닌 구보더의 인원이, 중요 인원 중 한 명에게 어떤 좋지 못한 일이 일어나는 걸 환영할 리도 없고. 그 이전에 진 유이치라는 인간이 쌓아온 유대가 그를 결코 하늘 위로 올려 보내지 않으려고 한다. 약속 시간이 9시 즈음. 그렇게 나왔다가, 전화를 걸고, 또 기다린 시간들. 집으로 돌아와 준비한 것까지 감안하면 시간은 곧 있으면 10시를 넘긴다. 카자마 소야는 이런 추위에 오랫동안 서있었던 탓에 발 끝이 여전히 시려워, 냅다 코타츠 안쪽으로 발을 쭉 뻗어 넣는다. 타치카와가 나도, 나도. 이런 태평한 소리나 하며 코트도 안 벗은 채로 쭈그려 앉아 손을 휙, 집어넣는다. 어라, 이거 누구 다리야? 타치카와는 장난을 치려 했다가 서늘하게 바라보는 카자마의 시선에 급히 얌전히 있길 택한다. 진은 그 사이에서 또 한참 말을 찾다가, 결국 웃고야 만다. 한 편의 희극이라 보기엔 그리 의도가 없고, 비극이라 보기엔 그런 일말의 불평이 끼어들 틈이 없는 시나리오다. 야채가 보글보글 설익은 채로 있을 즈음 고기를 집어넣고, 붉은 것의 색이 익기를 잠깐 기다린다. 타치카와는 3초의 법칙이라며 젓가락으로 고기를 집어 꾸욱. 눌렀다가 3초 뒤에 들면 적당히 익는다고 주장한다. 진은 한 번 해보겠다며 굳이 3초 꾸욱, 눌렀다가 떼어내며 짧게 감탄사를 뱉는다. 카자마는 얘네랑 있으면 정신연령이 보다 하락할 것 같단 생각을 하지만, 타치카와가 사온 술을 봐서라도 그 말을 삼가기로 한다. 시답잖은 말이 오간다. 그래서 결국 크리스마스 파티는 보내게 된 건가? 하지만 아직 케이크를 자르지 않았는 걸. 우선 진 먹일 생각부터 해라. 에잉. 나도 저녁 먹어야 하고. 카자마 씨 밥 안 먹었어? 저녁 먹을 시간에 너희 부른 건데. 그렇게 이야기는 삼천포로 빠져나가 흐른다. 간장에 고기를 조심히 찍어먹고, 와사비를 끝에 풀어 사각거리는 식감 남은 배추에 알싸함을 더한다. 명색이 계란 간장인데 계란이 없냐고 타치카와가 투덜거리면, 카자마는 티가 나게 한숨을 쉬며 일어선다. 그건 일종의 ‘알겠으니 기다려봐’ 정도의 표식이었기에, 타치카와는 헤. 하고 멍청하게 웃기만 했고, 진은 빈 속에 따뜻한 음식이 자리잡는 감각을 느끼는 것 만으로 충분해 조용히 지켜본다.
유난히 추운 해다. 굳이 네이버의 침공이 아니라 하더라도 세계도 변하고, 시대가 변하며, 날씨도 점점 더 변질된다. 트리온체는 추위를 견디기에 효율적이고, 진은 스스로의 모습을 트리온체로 두고 있는지, 아닌지를 구분하기 위해 굳이 둔탁한 곳에 손등을 부딪히곤 했다. 들킨 건 카자마 앞에서였다. 그 이후로 진은 늘 트리거 오프, 라는 정 반대의 구절을 입가에 붙이게 됐다. 이곳엔 신을 믿는 자 없고, 미카도 시는 종교와 거리가 멀다. 그러니 그 외의 거추장스러운 성경구절과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육신에 대한 나불거림을 진은 자신의 머리 안에서 끊어둔다. 아주 미약한 음성이 귓가를 스치는 듯 했다. 불. 물. 그 다음엔? 카자마가 간장 적당히 묻힌 고기와 야채를 입에 넣고 씹다가, 맥주 입에 붙이는 순간과 동시에 모조리 삼키는 걸 보고 모종의 미래를 본다. 카자마 씨, 적당히 마셔야 하는 거 아냐? 카자마는 그걸 깔끔히 무시하고 발로 타치카와의 무릎이나 쭉쭉 밀어 진 쪽으로 넘긴다. 진은 이 미래를 봤기에, 슬쩍 무릎을 치워두는 것으로 무사히 타치카와의 양말 신은 발 끝이 비죽. 하고 코타츠 밖으로 나가는 것에 일조한다. 어떤 침체된 고민은 대부분 미래가 아니라 과거에 묶여있으나 자신은 미래를 보기에 바쁜 사람이었기에, 진은 운 좋게도 많은 비난과 사고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 환경을 조성해주다 못해 늘 변수를 일으키곤 하는 사람들을 그는 놓을 수가 없다. 적당히 배가 찼단 생각이 든 뒤에도 뺨에 열 오른 카자마와 어쩐지 케이크 노래를 부르며 드러눕게 된 타치카와에 의해, 진은 오랜만에 과식을 하게 된다.
VIII.
술도 몇 잔 쨍- 하고 유리 잔이 아니라 틴 캔에 부딪히게 두고, 냉장고 안에 꿍쳐둔 비싼 럼주를 꺼내 또 잡담 하며 시간 보내다 보면 12월 25일은 무슨, 12월 26일이 되어버린다. 어영부영 떠들다가 언급된 케이크에 한참 시노다 씨와 다시 대련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열띈 토론을 하던 진과 타치카와는 합, 하고 입을 다문다. 주변에는 잘 뜯긴 고기 포장지-스티로폼이 서너개 겹쳐져 있고, 코타츠 밖으론 양말이나 겉 코트 같은 것들이 널부러진 채다. 술 향기보단 나베 특유의 국물 향이 더 진하게 나는 것이 다행인지 뭔지. 그 상황에서 카자마는 잘도 냉장고 안에 있던 케이크를 꺼낸다. 진은 그 틈을 타 꾸물꾸물 나베와 그 아래의 가스레인지를 들어 옆으로 밀어둔다. 그 사이 타치카와는 비어버린 탁자 위를 큰 생각 없이 옷 소매로 휙휙 닦으며 먼지인지 뭔지 모를 것을 치운다. 옷을 먼지포로 쓰는 건가? 와! 케이크다. 초는 있어, 카자마 씨? 그런 건 없을 걸. 에엥, 진. 그건 또 미래로 본 거냐? 조잘조잘, 왱알왱알. 카자마는 벌때들이 잉잉 징징 거리는 소리와 이 소음이 닮아있다 생각한다. 친숙하면서 낯설고, 자신 인생에서 이런 걸 남길 사람도 이 둘이 전부일 거다. 제 부대의 소년들을 떠올리고, 보더 상층부를, 인원이 달라진 가족을 복기한 뒤에 미소지으면서 케이크를 내려둔다. 사둬서 다행인 일이지. 내년에도 혹시나 모르니 같은 걸로 준비해두지. 뭐야, 카자마 씨. 그거 설마 우리와의 오붓한 크리스마스를 원한다는- 수저로 퍼먹을 생각 하지마. 네에. 넵. 그리고 이 장면에서 셋은 정확히 다른 생각을 머리에 담는다. 결과적으론 같은 의미를 담은 것이다.
진 유이치는 이런 식의 크리스마스를 만난 적 없기에 색다르면서도 우습고, 이런 단촐한 형태의 파티여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한다. 비록 집의 구석은 여전히 시린 구석이 있지만 모두가 뭉쳐있는 코타츠는 따뜻하니까. 그래서 불, 물 그 다음의 원소나 당시 수업 때 배운 시를 떠올리는 것 대신 웃음소리를 내며 젓가락으로 케이크 자르기 신공을 보이기로 한다. 아라시야마는 자신의 물음에 늘 답하며 그 시구절이 시험에 나왔을 때 얼마나 망쳤는 지에 대한 일화를 꺼내며 상념을 끊어주었다. 타치카와 씨와 카자마 씨는 아예 그런 고민이 들지 않게 한다. 색다른 접근법이다.
타치카와 케이는 핸드폰의 존재를 까먹는다. 맨 상단에 놓인 채팅방의 고정은 아까 진즉에 이야기 하면서 풀어버렸다. 카자마 말하길, “연락이 되든 안 되든 반감만 생기는 관계라면 진즉에 정리하는게 더 마음 편하지 않겠나?”란다. 그러면 들어야지. 비록 카자마 소야는 그 상대를 가족이라 콕 집어두지 않았으나… 카자마가 자신의 화면 위에 올라온 가족이라는 단어를 본 적은 원정선에서도, 밖에서도 몇 번 있었을 테니. 자신의 천진난만한 학생 시절을 옆에서 봐온 진이라면 또 입이 아플 테다. 그렇게 아즈마나 니노미야, 카코가 떠들고 있는 곳에서 케이크 사진만 띡, 하니 잘라서 보낸다.
카자마 소야는… 말이 더 필요한가? 그는 자신의 형제와 늘 준비하던 케이크를, 이번 년도에 처음으로 타인에게 대접하게 됐다. 슬프거나 기쁘지 않았고, 언젠간 올 법한 일이라 믿은 적 없었으니 초연한 태도도 아니었다. 문득 케이크 위에 얹어진 초콜릿 장식의 분배에 대해 시답잖은 말을 하는 둘 사이로 입을 연다. 12월 26일은 성 스테파노의 축일이라 하더군. 그러면 타치카와는 어디서 그런 단어를 들은 거냐고 영 멍청한 얼굴을 하고, 진은 케이크 위에 놓인 초콜릿을 슬쩍 가져가 자기 앞에 놓는다. 카자마는 동생을 바라보는 형제의 시선을 짐작한다. 그리고 그것 만으로 모든 것들이 만족스러워진다.
12월 26일, 아마 새벽 30분 즈음. 술에 취하고, 맛난 나베도 먹고, 이제는 거의 분해되고 해체된 케이크를 코타츠 위에 얹은 채로 수다를 떠는 셋의 청년이 있다. 이들은 과하게 우울하지도 않고, 지나치게 들뜨지도 않은 삶을 산다. 보더 내에서의 연말 특수 수당에 대해서 조잘거리다가도 이제 슬슬 받은 돈을 다른 은행에 저축해 더 불려야하지 않냐는 현실적인 말을 하고, 그러다 금방 아는게 없어 머리 막히는 측면이 생기면 금방 그래서 다음 원정선에 올라탈 애들은… 요전에 아즈마 씨가 미와에게 말이야… 그러고보니 키도 씨가… 늘 하던 이야기의 연속이다. 이즈음 되니 텔레비전이나 틀고 과자 까먹으며 하던 이야기나 계속 우려먹는 작자들과 다를 바가 뭐가 있나 싶겠지만, 이런 구닥다리 감성을 지닌 인간들 처럼 구는 것도 괜찮은 일 아니겠는가. 진 유이치는 크리스마스날 케이크를 먹지 못했고, 타치카와 케이의 첫 번째 연말 파티는 흐지부지 종결났으며 카자마 소야는 친구들과 한 약속을 어겼다. 그러나 괜찮은 일 아니겠는가. 딸꾹, 하고 소리가 나면 금방 그 뒤를 웃음과 별 무게 없는 말들이 힘 없는 탁구공처럼 공간을 돌아다닌다. 결국 스테파노 성 축일 날에는 케이크를 맞춰 잘랐고, 2회차 연말 파티는 성공적이었으며, 어찌됐든 친구에 가까운 사람들과 시간을 보냈다. 다를 바 없는 하루. 규격 외의 일상과 예측 범위 내의 미적지근하고 뭉특한 따뜻함. 이게 보편적이고 평범한 파티가 아니면 뭐겠는가. 다음 날 정신 차려 보더에 출근한 카자마는 뻗어버린 타치카와와 숙취에 시달리는 진을 보고 의아해한 주변에 ‘진부한 크리스마스를 보냈지.’라고 감상을 일축해서 답했다.
-끝.-